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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레디-메이드인생

지삼이 2017. 9. 8. 15:50

한 배우의 목에 화이트칼라가 채워진다. 그렇게 그 배우는 주인공 P가 된다. 화이트칼라는 이 배우의 목에서 저 배우의 옮겨간다. 남자 배우에서 여자 배우로, 키 큰 배우에서 작은 배우로, 극이 진행되며 사실 P는 누구라도 상관 없이 흘러간다. 의자였던 까만 상자는 카페의 테이블이 되고, 또 메뉴판이 되고, 이제 이것 또한 아무래도 상관 없다. 무심해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치밀한 연출이다. 무엇을 보든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니까. 표상을 걷어낸 곳에는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자리잡고 있었다. 

세상이 만들어냈지만 받아줄 정작 그들이 살아갈 세상은 없다. 레디-메이드 인생들은 커져버린 머리와 빈약한 몸을 가진 채 도시 이 곳 저 곳을 헤맨다. 

4년 내내 배우던 인문학을 머리와 가슴에 품은 채 취업시장에서 당황하던 우리들을 생각한다. 이러려고 그 노력을 한게 아닌데,라며 자조적인 웃음을 띄던 전업주부 친구를 생각한다.대안 없는 세상에 배출된 대안학교 친구들을 생각한다. 서식지 없이 복원된 반달가슴곰을 생각한다. 기성품으로 만들어놓기만 했지 속을 나 자신으로 채우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던 사회를 생각한다. 화이트칼라가 우리 모두의 목에 채워져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애써 아닌척 하면 아닐 줄 알았다. 좋은 작품이었다. 

*빈틈 없는 보름의 연출에 울컥했다. 최선을 다 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 유머코드 우주대박살남. 너무 재밌어.

연극 레디메이드인생 / 연출 강보름 / 원작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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