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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5 에어 오케스트라

지삼이 2025. 3. 5.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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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급한 부탁을 받았다.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 연주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연주자 몇 명이 사정으로 불참하게 되어 내가 필요하다는 것. 어디서 연락처를 넘겨받았나 했더니 몇 년 전 함께 하던 체부동오케스트라를 통해 구했단다. 아이고 저는 클라리넷 전공자가 아닙니다, 연주도 사람들 앞에서 보여줄 만큼이 아니에요, 취미로 하는 거고, 그것도 안 한지 몇 년 됐어요, 그때도 소리도 못 내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거라서 칭찬받았던 거지 정말 어휴 전 아닙니다, 참 열심히도 거부했다. 못해도 괜찮으니 한 번만 도와달란다. 못해도 괜찮다고? 이 말에 용기가 생겨 참가하게 된다. 주변에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 두 명만 더 구해달라길래 플루트를 가지고만 있는 A와 꿈속 악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나는 B를 데리고 공연장으로 갔다. 가니 공연이 곧 시작하려 하고 나는 지인들과 함께 맨 앞줄 관객석 기준 오른편에 자리 잡았다. 

앞줄에 자리한 탓에 지휘자의 표정이 또렷이 보였다. 꽤 명망있는 지휘자로 보였는데, 침통한 표정이다. 옆의 연주자들도 그리 표정이 좋지 않다. 이 공연은 에어오케스트라 공연이었다. 모두가 악기를 연주하는 척해야 했고, 지휘자는 그들을 상대로 열심히 지휘를 해야 했다. 음악은 미리 준비된 음원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고, 관객은 만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내 지인들도 악기를 가져오지 않았네, 그렇게 연주는 시작된다. 다행히 아는 음악이었고, 클라리넷 소리가 무엇인지는 구분할 수 있으니 클라리넷이 나올 때마다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클라리넷을 부는 척했다. 어색했지만 어쨌든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문제는 옆의 플루트인데 (이때부터 B는 포커스아웃되어 보이지 않았다) 플루트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니 언제 악기를 연주해야 할지 모르고, 지휘자의 신호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였다. 공연을 망치면 안 돼, 나는 초조해져서 클라리넷을 불다 말고 플루트 소리까지 챙기기 시작했다. 세로로 부는 악기와 가로로 부는 악기를 번갈아가며 하려니 엉망이 되고, 어느 순간에는 플루트소리인지 모르고 클라리넷인척 하기도 했다. 동시에 나오는 구간에서는 지인을 팔꿈치로 치며, 야 너잖아!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첫 곡이 끝났다. 지휘자는 여전히 많이 절망스럽다.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은 유흥으로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다. 음악을 아는 사람들은 나와 지인의 오합지졸을 그대로 목격하고 있었고, 연주자와 지휘자는 엉망진창인 나를 이 무대를 준비하고 자신들을 섭외한 잔인한 사람들과 동류로 봤다. 다음곡이 시작되었다. 중간쯤 나는 깨닫는다. 우리만 악보가 없다. 적어도 악보라도 있었으면 악보를 따라가며 '더 그럴듯한 척'을 할 수 있었을 테다. 이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나에게 부탁한 사람들은 악보를 줬어야 하고, 아니었어도 내가 악보를 요구할 수 있었어야 했다. 모든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고 엉망인 이 공연 안에서 최선을 다해 운지를 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 것이 그들에게 처참하고 잔인한 공연이라 해도. 마을 오케스트라 단원에게까지 제안이 올 정도로 사람을 구할 수 없었던 엉망인 기획이었다 해도. 

두 곡이 모두 끝났다. 공연은 이로서 끝이다. 어떻게 그런 실력으로 여기 앉아서 나란히 연주를 할 수 있었냐는 원망하고 경멸하는 표정, 이렇게까지 자신들이 쌓아온 것들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와서 더 엉망으로 구는 우리를 바라보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억울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래, 내가 악보라도 있었으면. 잘하지 못하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나마 퍼포먼스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더 열심히 생각했으면. 나는 못하잖아, 못해도 괜찮다잖아,라는 마음으로 '대충'열심히 했다. 열심히 안 한 건 아닌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지 않았다. 이런 반성 끝에 잠을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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