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13

방황하는 눈동자

큰 무대의 통역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용기가 아니라 오만이었다는 것. 전날부터의 긴장감은 모든 행사가 끝나고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드라마 한 편을 보고 2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무대를 보면서 혼자 생각할 때는 잘만 정리되던 것이 무대에 나가니 들리지도 않고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무대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함께 한 분들은 '용기가 좋았다, 처음인데 잘 했다' 라며 위로도 해주시고 '초조하고 성급한게 다 보인다, 머리가 굴러가는 건 보이는데 손은 가만히 있더라,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해도 괜찮다'며 평가와 조언도 해주셨다. 위로에 위안을 얻을 필요는 없다. 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수어통역이 제공되는 것은 그냥 곁가지가 ..

day 2022.05.01

9층 다음 7층

퇴근 후 늦은 세미나까지 마치고 돌아온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문이 열리고 한 발, 몸을 밀어 넣는 중 한 어르신이 급하게 들어온다. 꾸벅 인사를 하고 진작부터 보고 있던 인스타그램 피드에 시선을 고정한다. 어르신도 눈인사를 마치고는 바로 핸드폰에 시선 고정. 흡사 거북이 두 마리 같다. - 7 층 - 9 층 내장되어있는 경쾌한 여자의 목소리가 내가 누른 층과 그가 내린 층을 차례로 읊는다. 9층 사시나 보네... 무심히 쓱 쓱 피드를 올리다가 "띵!" 문이 열리고, 여전히 폰에 얼굴을 묻은채 천천히 내려 익숙하게 우회전 한다. 문앞에 도착해서야 고개를 들었는데, 902호?? 뭐지? 왜지? 뭐지? 잠깐의 혼돈과 깨달음. 다시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어가 다급하게 말한다. 저기요! 여기 9층인데요! 아, 그는 ..

day 2022.04.15

숨이 턱

'회원님을 위한 추천' 슥 슥 넘겨버리면 그만인 계정들이 즐비한 목록. 가끔 그 이전엔 알았으나 지금은 몰라도 되는 이들이 뜰 때 근황을 살필 겸 들어가 보기도 하는 그. 오늘은 달랐다. 차마 넘겨버릴 수 없던 이름. 들어가보니 바로 전 날까지도 맛있는 회 사진을 올려놓았네. 아래 댓글엔 추모의 댓글이 가득하다. 죽어서도 세상을 뜨지 못하는 영혼들처럼, 인스타 속 오빠는 건재하다. 덕분에 내 옅어진 그리움도 단숨에 차오른다.

day 2021.03.23

퇴근의 즐거움

사무실 뒤로 산을 넘는다. 사람 없는 곳에서는 마스크 내리고 크게 숨도 쉬며 큰 보폭으로 걸어 한 시간이면 시장. 시금치 한단과 청양고추 한 줌을 사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여기 담아주세요, 하며 말을 섞고 또 한참을 걸어 계곡이다. 근방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맡겨놓은 와인 두 병을 받아서는 다시 걷는다. 계곡을 올라 성곽을 지나 20분을 더 걸어 집. 쌀국수 면을 삶는다. 동시에 시금치와 청양고추, 마늘과 파를 기름에 볶는다. 잘 볶아질 즈음 면도 알맞게 익는다. 간장과 소금 후추를 넣고 더 볶아주면 맛있는 볶음면 완성. 빨리 먹으면 안 된다. 평소보다 느릿하게. 종일의 피로를 해소시켜주는 아주 확실한 움직임.

day 2021.01.27

역시

‘역시 너야’ 라는 말을 들을 때를 생각한다. 1.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2. 지독한 편견 그대로 행할 때 3. 기대했던 모습을 보여줬을 때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상대를 꿰뚫어본다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하니 다시 써본다. ‘역시 ~야’ 라는 말을 쓸 때를 생각한다. 1. 대상의 행위가 내마음에 쏙 들 때 2. 대상의 행위가 내 생각과 맞아떨어질 때 3. 대상의 행위가 내 기대와 맞을 때 보통의 관계에서 완벽히 일치된 소통은 불가능 하기에 결국 내 모든 것은 내 마음의 문제이고 그렇다면 라는 말은 무척 오만한 말이 된다. 비슷한 말로는 가 있다. 자신의 편견을 입밖으로 내어놓는데 어떠한 주저함이 없고 당당하다. 조심해야 할 말 추가.

day 2020.03.20

와인과 기후변화

2016. 11. 녹색연합 소식지 녹색희망 기고글 “친구 삼촌이 와이너리를 하신대. 한번 같이 놀러 가보지 않을래?”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술 마실 틈과 술 마실 에너지는 있는 나에게 친구의 제안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와인은 맛도 모르고 마시는 와알못(와인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와이너리라니. 포도향에 취해 끝없는 포도밭을 걸어다니고, 포도를 함께 수확하고, 오크통에 있는 와인을 들여다보고, 함께 포도알을 발로 밟으며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그렇게 프랑스로 갔다. 도착해보니 와인 제조와 관련한 모든 일정이 끝난 후라 민망했다는 후문. 좋은 음식은 여행하지 않는다. 파리로부터 남서쪽으로 304km떨어진 Anetz는 Loire강이 유유히 흐르는 평화로운 동네다..

day 2020.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