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13

요즘 나는

아기가 집만 짓다가 가버렸다. 아직 올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나중에 와야 할 때 오겠지, 생각 한다. 수술을 받고 예정에 없던 휴직을 한 달동안 하게 되었다. 임신때보다 몸이 훨씬 가볍고 나아졌지만 외출은 삼가야 해서 집 안에서 머리만 활성화 시키고 있다. 마음이 점점 맑아지고 있다. 창문이 커서 다행이다. 경험이 많아지고, 경험에 따른 감정도 배워가는 중이다. 살아오면서 겪지 않았던 일들이 드문 드문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를 함께 할 짝이 생겼고 분명 남이었다가 가장 가까이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다. 또 태어나면서부터 옆에 있던 형제의 죽음은.. 상대와의 추억은 인연이 끝이 날 때 그제야 생명을 얻는다. 30여년간 곱씹어 본 적 없는 그와의 추억이 떠올라 여전히 울컥한다. 때와 장소를..

day 2018.03.16

알레그리아

기쁨은 슬픔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견딜만 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내년에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다가 중간에 목이 막혔다. 겁이 났다. 삶은 무슨 일이든 벌어지는 법이니.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기쁜 일을 많이 만들고 기꺼이 기쁜 상황 속으로 들어가겠다. 언제나 힘들겠지만. 늘 그랬듯이. 2017년과 2018년의 경계는 너무 우습다만 그래도 한권의 스케줄러를 서랍속에 넣는 날은 기릴만 한 거 같다. ​ 그래서 열두시를 기다리며 사치스러운 혼술을 시작한다. ​

day 2017.12.31

오늘의 생각

일을 떠나니 일 뒤로 미뤄놓았던 생각이 밀려온다. 이 생각 저 생각이 서로 교차하고 부딪치고 자기들끼리 싸운다. 오늘 통가리로국립공원을 가로지르며 역시나 생각들의 늪에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실마리 하나가 띵. ​ 요즘 친한 동생 하나가 자꾸 선을 넘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차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잘 지냈는데 지금 이야기 하면 좀 웃기지 않나? 그런데 얜 자꾸 선을 넘네, 요즘 조금 더 심해지네, 이러다 친구 정리하지 싶네, 이러던 차였다. 좋아하는 친구인데 어느 순간 내가 너무 못견디겠다 싶으면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순간들이었다. 이제는 2년이 된 그 언니와의 끊겨진 관계가 갑자기 떠올랐다. 와, 그랬네, 그사람도 그랬네. 서로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준 채로 친해져버린 관..

day 2017.11.30

내가 하늘이다, 라는 날씨

어찌 저찌 하여 뉴질랜드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타우포라는 지역에 와있다. 친구와 함께 왔다가 하룻밤이 지나 친구는 먼저 돌아가고 나 혼자 남아 내일 있을 트렉킹 투어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린다고 하지만 사실 한적한 시간을 즐기는 중이다. 걷다가 울먹거리는 아이를 보았다. 자기 키만한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겠다고 버튼을 힘차게 누른 후,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까치발을 하고 서 입을 가져가는 순간 힘이 풀려 계속 물을 마시지 못해서 결국 울음이 터진 것이다. ​ 물 마시고 싶어? 물어보니 울음을 그치지 못한 채 세게 고개를 끄덕인다. 버튼을 눌러주고, 입을 아주 살짝 축이더니 신나서 엄마에게 뛰어갔다. 하늘은 맑고 맑다못해 해가 쨍했다. 이런 나라에서는 모자와 선글라스가 필수일 수밖에 없겠다. 적도와 가까워서..

day 2017.11.29

연극 레디-메이드인생

한 배우의 목에 화이트칼라가 채워진다. 그렇게 그 배우는 주인공 P가 된다. 화이트칼라는 이 배우의 목에서 저 배우의 옮겨간다. 남자 배우에서 여자 배우로, 키 큰 배우에서 작은 배우로, 극이 진행되며 사실 P는 누구라도 상관 없이 흘러간다. 의자였던 까만 상자는 카페의 테이블이 되고, 또 메뉴판이 되고, 이제 이것 또한 아무래도 상관 없다. 무심해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치밀한 연출이다. 무엇을 보든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니까. 표상을 걷어낸 곳에는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자리잡고 있었다. 세상이 만들어냈지만 받아줄 정작 그들이 살아갈 세상은 없다. 레디-메이드 인생들은 커져버린 머리와 빈약한 몸을 가진 채 도시 이 곳 저 곳을 헤맨다. 4년 내내 배우던 인문학을 머리와 가슴에 품은 채 취업시..

day 2017.09.08

와인 마시던 밤

방가와 충무로에서 만나 소주 데이트를 했다. 신나게 마시던 중 스팸 문자를 받았다. 집 앞 와인가게에서 5만원 이상 와인 구입시 3만원 상당의 와인잔을 준단다. 대차게 출발했다. 소화시킨다며 한시간을 걸었다. 5만원어치 와인을 사기 위해선 거짓말일지 모를 7만원-3만원 행사 와인을 두 병이나 사야한다. 샀다. 와인을 좋아하는 아빠를 생각한다. 한 병 드리자. 전화를 했다. 당연히 재희와 새언니와 함께 있단다. 전화를 받고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기다리란다. 아빠 집에 있으란다. 갔다. 정확히 십분 후 집앞에 아빠가 도착한다. 얼른 올라가란다. 지선이가 보자고 하다니 너무 좋단다. 와인만 드리고 집에 가려던 우리는 식탁에 마주앉아 아빠가 아끼던 와인을 함께 딴다. 그 후로 2시간 30분. 아빠는 아빠..

day 2017.08.25